top of page

정미조의 근작 - 변모의 전조

 

 원색들의 충돌과 조화, 난무하는 곡선들, 그 색깔들과 선들의 틈으로 드러나는 춤추는 형상들; 이러한 것들은 화가 정미조의 1990년대 작품들의 주된 특징들이다. 그녀의 이번 개인전의 작품들은 장르상으로나 경향상 위의 작품들과 매우 다르다. 간헐적으로 판화, 조각(1998)과 설치 작품(1996)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주로 붓, 물감, 캔버스와 작가의 격정적인 몸짓이 만나 추상성과 형상성을 경계를 허무는 작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형적인 회화적 특성을 지닌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장르상 그래픽적 요소(도안적인 직선과 형태)와  조각적 요소(릴리프)가 결합된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이전의 굵기와 그어진 방향이 불규칙하고 색상이 화려했던 곡선 대신에 규칙적으로 반복된 직선이, 그리고 비정형의 형태의 인물 모습이나 동물과 같은 무희 형상 대신에 머리와 몸통과 다리를 각진 평면 형태로 단순화된 서있는 인체가 나왔다. 이를 통해서 그녀의 근작들에서는 이전의 회화 매체의 속성들이 사라지고 그래픽적 요소가 들어 왔다. 이러한 도안가(draughtsman)적 엄격함을 통해서 근작들에서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만만滿滿하게 표현되었던 작가의 격정이 가라앉혀졌다. 이전에는 인체 형상이 선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것들 사이에서 나타난 반면, 근작에서는 독립된 형태로서 직선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다.

정미조의 근작들은 대중에게 소개된 1984년 이후의 그녀의 작업 세계에서 세 번째 전기를 이루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1기는 1986년까지로, 넓적한 붓과 여인 형상이, 그리고 붓대 금속부분의 얼룩이 파리 야경과 이중이미지로 보이는 초현실주의적인 그림들이 제작된 시기이다. 

제2기는 그녀가 우리나라의 무신도巫神圖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형성되어 199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세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경향은 1994년까지의 <靈> 연작으로 그녀가 논문을 쓰면서 직접 보았던 무신도에 나오는 오방색을 지녔으며, 격정적으로 그어진 붓 자국들과 긁어 생긴 선들로 덮인 작품들이다. 절규나 비상 같이 인물의 여러 표정과 자세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엉킨 곡선들이 변성變成되면서 나타나는 이 작품들은 무당의 신기神氣를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경향은 <기호․형상․상징> 연작이다. 이 작품들 역시 오방색이지만 넓어진 붓 자국으로 덮인 화면이 형태가 단순화되고 왜곡된 무희 실루엣만 남기고 단색조의 물감으로 덧칠된 것들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나라 전통미술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무희 실루엣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무희들의 그것과 닮은 사실을 통해서다. 세 번째 경향은 2기와 3기를 잇는 과도기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변모> 연작인데, 이것의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캔버스를 단색조 물감으로 덧칠한 방식은 바로 전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백색이나 흑색 물감으로 화면을 완전히 덮은 후 프리핸드(freehand)로 직선들을 그어 물감의 마지막 층을 긁어냈다.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 인물 형상의 형태는 각지고 도안적이다. 직선과 각진 형태, 그리고 긁힌 직선자국에 의해서 드러나는 바탕화면과 긁히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직선은 관객의 망막의 잔상을 통해서 옵 아트적 효과를 낸다. 이것은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며, 제3기인 근작들에서도 발견된다.

정미조의 근작들에서는 이전의 어떤 시기에서보다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장르와 작품 제작방식에 있어서다. 이 작품들은 두께와 폭이 일정한 각목들이 창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되어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 기본 구조는 양끝이 막힌 것이다. 각목이 수직과 수평으로 만나는 것은 이 기본 구조가 변주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벽에 걸리면 관객의 눈높이와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각목의 그림자는 이러한 옵 아트적 효과를 더욱 강하게 한다. 작품이 걸렸을 때 빈 벽과 각목이 만드는 직선은 <변모> 연작에서 긁혀 나온 바탕색 선과 덧칠한 색 선이 도식화되고 3차원적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체 형상 역시 기하학적 형태로 도식화되었다. 이 형상은 각목들을 잘라 내어 만든 것인데, 빈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그 형태대로 잘려진 나무판이 각목들 사이에 끼워져 생겨났다. 이 형상은 어떤 경우에는 ‘창살’과 연결된 판자의 일부가 그 형태대로 잘려 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오브제 작품들은 기하학의 엄격함과 질서를 통해 차갑고 통제된 느낌을 준다.

오브제 작품들은 작가가 컴퓨터 안에서 그린 것을 3차원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 작품들의 색상은 이러한 제작 방식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색채들이 오방색을 주축으로 한 원색이었던 반면, 근작들의 색상은 공장에서 혼합되어 생산된 중간색들이다. 이에 따라 제2기의 작품들이 숲과 같은 자연을 연상시켰던 것과는 달리 근작들은 도시를 연상시킨다.

이 오브제 작품들은 외형상으로는 이전의 작품과 구별되지만, 조형 방식과 내용상에 있어서는 작가의 초기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 정미조의 작품에는 항상 추상적 요소와 형상적 요소가 있다. 초기 ‘붓 그림’에서도 붓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반면, 야경을 표현한 붓대의 얼룩은, 부분적으로는 윌리엄 터너나 제임스 휘슬러의 야경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추상화에 가깝다. 제2기의 작품들은 엉킨 붓 자국들과 긁힌 선들로 완성된 추상표현주의적인 그림들이지만, 붓 자국들 사이에는 인물 형상이 숨어 있다. 이러한 추상화적인 화면과 인물이미지는 모두 선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그녀의 작업의 두 번째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의 세 번째 공통점은 그것들이 자전적이며, 따라서 그것들에는 각 시기 작가의 심적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靈> 연작은 물론 근작들의 <남과 여>나 <창가에서>, <둘 사이>나 <은밀한 대화>처럼 설명적인 제목들은 그녀의 인물형상을 도상학적으로 해석 가능하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정미조는 1972년부터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1979년까지 7년 반 동안 가수로 활동했고, 대단히 유명했다. 1980년대 중엽의 파리 야경그림들 가운데 붓대 위에 여인 모자가 씌워 있는 것과 붓대 끝의 구멍이 특히 강조되어 노래하는 여인의 입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특히 이 그림들은 당시 파리 야경을 그리고 있는 30대 화가 정미조의 화려했던 무대와 가수로서의 20대의 삶에 대한 향수의 소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가 무신도에 관해 박사논문을 쓸 정도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외국에서 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테마였기 때문은 아닌 듯 하다. 어렸을 적에 발레를 배워 이미 가수가 되기 전부터 관객 앞에서 ‘퍼포먼스’ 하는 것에 익숙했고,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던 그녀에게 무당/박수와 그녀/그가 사용하는 무신도는 작가 자신과 그녀의 작업과 동일시할 수 있는 테마였던 것 같다. <靈> 연작은 마치 작가가 캔버스 앞에서 춤을 춘 흔적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출현하는 여러 ‘靈’들은 작가의 영혼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는 작가의 그리는 행위와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가 하나가 되어, 붓질 하나 하나가, 물감 자국 하나 하나가 작가의 노래이자 춤이 되었다.

반면 <기호․형상․상징> 연작에서 붓질은 전과 비교해서 훨씬 온순해졌다.  작가는 자신의 몸짓을 캔버스에 직접 전이시키기보다는 추상적 화면 위에 드로잉으로 무희를 그렸다. 이 무희들은 윤곽선을 통해서 배경과 선명히 구분되어 있다. 이들 역시 모자를 쓴 붓대나 ‘노래하는’ 붓대 그리고 근작의 기하학적 형태의 실루엣과 마찬가지로 화가 자신의 모습의 투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무희들은 초기 그림들과는 달리 작가의 과거에 대한 향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미조는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이후 22년 간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화면에서 선묘나 평면적 실루엣으로 나와 배경화면과 구분된 무희 형상은, 이 작품들을 이 다음 시기에 나오는 <변모> 연작이나 근작들과 연결시켜 볼 때, 화가 자신에게 결핍된 것,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과 노래와 춤이 하나가 되었던 <靈> 연작과는 달리 <기호․형상․상징> 연작은 무희를 그림으로써 작가가 중단했으나, 아마도 잠재의식 속에서는, 하고 싶어하는 노래와 춤을 간접적으로 시연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대리 행위를 통해서, 그녀의 한 작품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녀 자신의 심리적 ‘밸런스’를 맞춘 듯하다. 

그러나 1999년 이후의 작품에서 인체 형상은 더 이상 다이내믹한 형상이 아니다. 인물은 정적으로 서 있고 팔은 없이 머리, 몸통과 다리가 평면화되어 전체 윤곽선 안에 들어가 있다. 그 형태 역시 모두 스테레오타입이다. 

근작들에서 인물 형상은 포박된 듯한 모습으로 나온다. <창가에서>와 같은 작품에서 형상은 철창들 속에 갇힌 듯이 보이고, <White Man>에서는 고독해 보인다. <둘 사이>나 <은밀한 대화>에서는 인물 형상이 주변과의 단절된 모습으로 나오는데, 근작들의 경우처럼 기하학적 오브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형상에서 느껴지는 소외감이나 고독은 더 커진다. 지금까지의 정미조의 작품 속의 인체 표현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형상들 역시 작가의 심리 상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와 춤과 같이 직접 몸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에 대한 화가의 갈망은 미술 속의 대리 행위를 통해서는 더 이상 해소되지 못하는 듯하다. 근작의 커진 스케일과 기하학적 조형 요소들은 인물 형상의 부자유스러운 상태를 더 강조한다. 

몸으로 하는 행위를 직접 관객 앞에서 시연하는 춤이나 노래와는 달리 그림은 행위의 결과물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매체이다. 근작의 억압을 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몸을 화가의 자전적인 의미에서 해석할 때 그것은 그녀의 현실에서는 해소되지 않고 있는 몸을 매체로 하는 다른 “예술” 행위에 대한 작가의 욕망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다른 근작들과는 달리 수평으로 배열된 각목들의 좌우 끝이 막히지 않았고, 그것의 왼 쪽 끝에 인물 형상이 서 있는 작품은 시사적이다. 이 형상은 기하학적 오브제에서 ‘벗어나’ 있어 일종의 억압이나 통제에서 해방된 듯이 보인다. 이 작품은 ‘다른’ 매체를 통한 자신의 표현을 억제하고 있던 모든 메커니즘들을 작가가 스스로 제거해야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암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는 9월에 TV의 한 방송에서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그녀가 이번 개인전과 때를 맞춰 22년 만에 갖는 이 '퍼포먼스'는 작가 자신과 분업화된 직업관을 전문성으로 여기는 우리 환경이 만든 ‘금기’를 깨트리는 행위에 버금간다. 따라서 이번의 몸으로 하는 ‘개인전’은 그녀의 향후 미술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희(미술사가, 철학박사)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