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조 드로잉의 자유로운 공생(共生)
정미조의 작품세계는 1984년 이후 대중에게 소개된 이후부터 크게 네 단계의 변화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파리유학 시절에 시도했던 서정적 스타일의 인물묘사와 붓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넓적한 붓과 여인 형상, 그리고 물감의 흔적이 남아 있 는 붓에서 볼 수 있는 파리 야경과 현실의 이미지를 나타낸 초현실주의적인 그림들이 다. 그 후 그녀의 박사 학위 논문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나라 무신도에 대한 연구로 영적인 세계를 격렬한 회화 기법으로 표현 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95년부터 몸짓의 연작을 시작으로 「기호, 형상, 상징」 연작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몸 짓 형상을 통하여 인체의 율동과 색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이것은 한 단계 더 나 아가 신체 기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징의미를 부여한다. 캔버스 위의 화려한 색채 를 얹어 놓고 흰색이나 회색으로 엷게 지워가면서 무희의 형상을 단순화했다. 백색이 나 검은색으로 화면을 완전히 덮은 후 간결하고 단순한 선으로 긁어내어(freehand) 물감의 마지막 층의 색상을 드러내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표현된 형태는 인체의 형태로 경직되고 도안적인 요소를 가진다. 이 이미지들을 더욱 단순화시켜 판화나 부 조, 조각, 설치 작업을 간헐적으로 시도한다. 더욱이 작가 정미조의 새로운 시도는 MDF 합판들을 이용한 오브제의 작업이다. 옵아트적 요소가 강한 이 작품들은 마치 창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두께와 폭이 일정한 MDF 합판들의 양 끝이 막혀 있는 것이 그 기본구조이다. 여기에 표현된 인체 형상 역시 기하학적 형태를 바탕으 로 도식화된다. 물론 오브제의 작업들은 평면성을 넘어 3차원의 공간으로 초대하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이러한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영(靈)의 세계」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정신현상을 가시화한 작품으로 작가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바로 캔버스 위이다.
정미조는 회화영역을 비롯해 설치작업, 판화를 통해 사물의 정신적 측면을 매체로 확 장해나간다. 이러한 정미조의 복합된 개성은 그녀의 수백 장의 드로잉 작업이 단계적 과정의 ‘초석’이 된다. 정미조의 드로잉 작업은 그녀의 대표작인 「영의 세계」 (1992-1994)와 「기호, 형상, 상징」(1995-1997) 연작 그리고 1980년대 초의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바가 없다.
유럽의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시대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장소에서 인물이나 누드미술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 인물이나 누드 미술이 유럽미술의 중 심적인 주제가 되어왔던 것은 단순히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만은 아 닐 것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소박하고 단순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표상으로 묘사되어 왔기 때문이다. 정미조 역시 작품 의 이상적 표상을 위해 가장 약점이라고 느끼는 것은 덮어서 감추고, 그것을 숭고한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그녀의 작품 속에 편입시킨다.
정미조는 인물과 자화상, 여성누드와 신체를 주로 습작한다. 이화여대와 초기 파리 유 학시절 때, 정미조의 누드 여인과 자화상은 실제적인 여인들로서, 고전의 격조와 인체 비례의 제약을 어느 정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엄한 아카데미풍의 정미조의 인물과 누드 드로잉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보이는 색채와 자유로운 포즈로 자연 그대로의 육체가 어떠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 여 실히 보인다. 냉철할 정도의 미적 계산이 된 드로잉은 현실적 촉감과 열정의 찬연함 과 따뜻함의 양의적인 내면을 가진 정미조의 초기 드로잉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심 스럽고 수줍어하는 누드의 여인과 점잖은 체 하는 동작의 인물은 무게와 반응을 가진 인물과 말을 거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인물로서 내적 속삭임과 내면의 이념에 빛나는 모습으로 전이된다.
정미조에게는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섬세함과 강인함의 분기점이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정미조는 단지 일념으로 인체 표현에 그녀의 전 능력을 쏟 고 있다. 숨겨진 어떤 종류의 뜨거운 전율, 기하학적인 윤곽과 더할 나위없는 곡선, 비해부학적인 인체비례가 자아내는 이상하기까지 한 미를 갖춘 인체 드로잉으로 자유 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인체를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파악하여, 인체의 괴량감 으로서의 무게, 인체가 자아내는 감정, 인체의 곡선의 작은 파동 등, 거기에서 유기적 관련을 탐지해내고 있다.
정미조의 인체 드로잉은 육체의 표현일까? 아니면 내부의 표현일까? 하는 질문을 던 져본다. 외부는 필연적으로 내부를 나타내고, 내부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규정하는 것 이 아닐까? 정미조가 나타낸 인체의 진실은 다름 아닌 ‘혼(魂)의 진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고향을 ‘영혼의 상’으로 이야기한다. 정미조의 세 번째 단계의 내면에 이미 구상되어 들어 있던 산과 들, 꽃과 나무, 뿌리와 잎사귀 등 자연의 모든 형상은 그녀의 내면과 자연을 분리할 수 없는 ‘신성함’으로 가시화한다. 정미조의 자연에 대 한 내적 떨림은 영원한 영혼의 세계를 추상적 조형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녀의 드로잉에 뜨거운 감정의 열광과 내적 떨림은 절도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의 동작, 단 순하지만 유동적 곡선의 중첩된 선으로 파장이 느껴지는 인체 묘사, 야수파적이면서 낭만파적인 정열적 색채로 분출되고 있다.
정미조의 작품 세계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드로잉들은 그녀의 화폭과의 공생(共 生)을 의미한다. 공생은 생물학적 용어이긴 하지만, 그것은 자아가 항상 거듭하여 대 상과 맺어지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계속 살아가는 것, 지속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미조의 지금까지 작품세계는 그녀의 수백 장의 드로잉 습작과 자 유로운 공생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인복교수(미술사가, 인천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