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화된 현태의 미
다채로운 색상의 화려함이 짧게 단속적으로 가해진 붓질에 따라 꿈틀대고 있다. 일정한 형태의 윤곽을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단색으로 메꿔 나갔고 그에 따라 밑칠이 남겨진 부분은 그 자체로 인체를 연상시키는 묘한 형태로 약동하고 있다. 재현을 의도하지 않은 어떤 형체 감, 기호나 상징 같은 것들이 구체적인 느낌과 동요, 정서의 부위를 자극시키고 있다. 바탕과 표면의 관계가 일치되면서 동시에 부단히 어긋나는 그림, 그러면서도 표면자체에 관한 흥미가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이 작가의 작업은 상당히 자신의 감정의 동요, 순간의 일시적 충동에 반응되는 추상회화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추상적인, 근원이 모호한 붓질과 색상은 일정한 이미지의 연상에 기여한다. 그가 재현하는 사물, 보여주는 사물은 이를테면 붓질, 터치, 색 점 같은 것이다. 이것들이 어떤 착시나 연상에 의해 인체를 떠올려주는 것이다.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지만 문장은 작가에게 속한다.’ 누구나 물감과 붓을 다루지만 각각의 작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화면을 구성한다. 또한 표면을 가득하니 채우고 있는 붓질의 난무는 그것 스스로 자족적인 조형언어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캔버스 전체를 색채의 필촉으로 덮어버리고 이번에는 그 위를 단일한 색 층으로 메꿔 나간다. 메꿔지지 않은 부분이 그림의 내용을 만들어 주면서 관자의 상상력 혹은 감정의 동요를 자극하는 그림이 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정한 깊이, 두개의 층을 지닌 화면이 탄생한다. 그는 다분한 영감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영감이란 우연의 행복과 같은 창조적인 힘이다. 자신의 행위,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그다지 확신하지 못한 체, 멈칫 거리지만 거의 본능적인 힘에 이끌리며 발산된 흔적이 유지, 정돈되고 있는 것이다.
그 화면은 ‘상승적 상상력’(바슐라르)으로, 미묘한 에너지로 그윽하다. 그리고 표면은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일정한 면적의 여백이 테두리를 점유하고 있고 중앙에는 오려진 듯한 형체감이 자리하고 있어 화면은 몇 개의 층으로 분할되면서 동시에 통합되어 있다. 그의 감정과 정신이 가득 채우다 미쳐 못 채운 화면 안으로 모종의 이미지가 응집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결코 인간/인체를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효과, 암시되는 인상, 하나의 시각적인,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더구나 그 약동하는 운율에 뒤척이는 형상과 꿈틀대는 짧은 필선들은 무엇보다도 음악적이다. 거의 난타되고 일정한 호흡으로 진정되는 그래서 이 운율의 뒤척임은 작가의 체질적이고, 심리적인, 생리적인 차원에서 풀어져 나오는 것 같다. 이 작가는 일종의 ‘감미로움과 화려한 쾌락주의’를 다소 거칠고 즉흥적으로 그러면서도 절충해서 내놓고 있다. 이 자기만족, 자기 유의라는 추상회화는 지나치게 표면 위에 넘실거리는 붓질과 색 점에 따른 심리의 고양, 동요, 드라마틱함 같은 것들에 제한될 수 있어 아쉽다. ‘그림’의 문제이기보다는 자신의 격정, 감정의 분출에 기인하는 물감의 덧칠과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물론 회화의 문제는 결국은 ‘색을 선택하고 칠하고 그린다’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그림의 문제와의 갈등을 스스로 짊어지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림에 대한, 시각이미지에 대한 사유와 반성이 거센 감정의 격랑에 기울고 있지 않나 하는, 그래서 ‘그림’의 자리에 ‘과도한 자아’에의 관심이 들어앉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보는 이들에게 갖가지 형태, 이미지 나아가 상상과 감정의 진폭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작가의 근작은 전작에 비해 다소 정돈되어 보인다. 그 외형의 변화 이면에는 작가의 심리적 변화, 개인 생활의 이동, 삶과 현실에 대한 반응과 적응의 여러 요소들이 일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다.
파리 시절, 그의 그림은 고독하고 외롭고 그러나 아름다운 구상화풍의 풍경이었다. 그 파리의 야경은 이국에서의 나른한 외로움과 고독, 절제와 그림에 대한 집념이 솔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일정한 시기를 거쳐 의도적으로 그 같은 심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환희, 약동, 화려함의 세계로 기울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레 우리의 굿, 무속의 세계를 접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과정이 그간의 작업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더욱 추상화되면서 이후 그의 그림에는 거침없는 붓질, 과감한 원색의 사용, 사물의 재현에서 벗어나 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관조하고 이끌어내는 과정에로 부단히 함몰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의 예술가적 기질, 선천적인 심리의 프리즘이 동원되면서 약동하는 정신, 운동, 에너지, 영혼, 氣같은 다분히 종교적 뉘앙스를 가시화하는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 귀국 이후의 작업이었다고 보여 지며 그런 흐름이 최근작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작업자체가 진폭 있게 변해가면서 그것이 민감하고 유약한 한 개인의 심리에의 반응에 따른 조절, 거부, 반전이라는 심리적 드라마와 동등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최근작은 보다 편하고 여유 있게 관자들의 시선에 스며드는 그림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림은 그 한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 그의 인생 드라마, 그 과정 자체이다. 그렇지만 그림 그리기는 그런 과정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그림/회화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추구와 기존의 회화적 관습에 대항하면서 자신이 독자한 삶의 경험과 정서를 세심하게 독창적으로 조형언어로 가시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긴장이나 반성이 상실된 그림그리기는 지나치게 자족적이고 유희적인 자기 심리의 블랙홀로 미끌어지는 선에서 부단히 자맥질 칠 수 있는 것이다. 그 균형, 중심잡기는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가?
박영택(미술평론가,경기대교수)
갤러리 시몬 1995.5.25~6.24